2026-09-12 · 백서린 (선임연구원)

사라지는 동네는 누가 기록하고 있을까? 철거 골목과 시민기록가 양성과정 관찰로 본 생활사 아카이브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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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동네는 대체 누가 기록하고 있을까요?

동네의 기억이 남느냐 사라지느냐를 가르는 것은 결국 누군가 그때 기록했는가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민속아카이브가 모아온 자료는 사진과 음원, 영상을 포함해 110만 점을 넘어섰고, 서울에서는 한 시민이 평생 모은 개인 자료 1,181건이 통째로 기증돼 전시와 연구에 쓰이고 있습니다. 기관만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2022년 청주에 첫 기초자치단체 기록관이 생긴 뒤 2025년 5월 이천이 뒤를 이었고, 남원처럼 주민을 시민기록가로 길러 마을 아카이브를 직접 구축하는 지역도 늘고 있습니다. 생활사 아카이브는 오래된 물건을 모으는 취미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평범한 일상을 나중에 설명할 수 있게 붙잡아두는 작업입니다.

목차

철거 예정 골목에서 기록단을 만난 오후

재개발이 확정된 한 골목에서 오후 내내 머문 적이 있습니다. 전봇대마다 안내문이 붙어 있고 이미 절반쯤은 빈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목 중간쯤에서 네 사람이 삼각대를 세워두고 셔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모집한 시민기록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찍고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낡은 대문이나 간판 같은 것만 찍을 줄 알았는데, 한 분은 계단 손잡이가 닳아 반들거리는 부분을 가까이서 찍고 있었습니다. 사람 손이 수십 년 지나간 자리라는 겁니다. 다른 분은 담벼락에 남은 전화번호를 적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연탄 배달집 번호라고 했습니다.

더 놀라웠던 건 기록 방식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뒤 바로 종이 양식에 위치와 시각, 찍은 이유를 적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게 어디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설명이었는데, 실제로 아카이브 현장에서 가장 자주 벌어지는 사고가 이것입니다. 사진은 수천 장 남았는데 어디를 찍은 것인지 몰라 쓸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그날 한 어르신이 지나가다 "우리 집도 찍어줘"라며 문을 열어줬습니다. 마루에 걸린 가족사진과 부엌의 찬장이 차례로 기록됐습니다. 그 집은 두 달 뒤에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그날 오후에 만든 파일 서른일곱 장과 양식 세 장뿐이었습니다.

아카이브가 모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맥락입니다

생활사 아카이브를 박물관 수장고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성격이 다릅니다. 박물관이 가치 있는 물건을 골라 보존한다면, 생활사 아카이브는 평범한 물건이 놓여 있던 자리와 쓰이던 방식을 함께 남기려 합니다. 다리미 하나를 받아도 그것을 누가 언제 어떻게 썼는지가 없으면 그냥 고철입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구술 기록이 사진만큼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물건의 맥락은 대개 사람의 말 속에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아카이브가 사진과 음원, 영상, 출판물을 함께 모아 서비스하는 구조도 같은 이유에서 나왔습니다. 한 종류의 매체만으로는 생활의 결이 복원되지 않습니다.

기증 자료의 힘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모은 영수증, 통지서, 일기, 사진첩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개별 항목은 사소해도 묶음 전체가 한 시대의 생활 구조를 보여줍니다. 서울에서 1,181건을 기증한 사례가 연구자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그 묶음이 흩어지지 않은 채로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기관과 시민, 두 축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지금 생활사 기록은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기관 축입니다. 국가와 광역 단위 기록원이 공공기록을 관리하면서 민간기록 수집을 병행하고, 생활사를 다루는 전문 박물관이 전시와 연구로 이어갑니다. 서울생활사박물관처럼 해방 이후 시민의 결혼·출산·교육·주거·생업을 주제로 삼아 인터뷰와 유물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민 축입니다. 주민이 직접 기록 주체가 되는 흐름인데요,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남원시가 시민기록가 양성에 나선 사례를 보면 주민이 직접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커뮤니티 아카이브 구축이 목표로 명시돼 있습니다. 2026년 제1회 시민기록가 양성과정은 마을 아카이브의 이해와 구술사 방법론, 구술 채록 실습으로 짜여 있어, 교육생이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구조입니다.

인천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주민이 자기 지역을 기록해 온라인 플랫폼에 모으는 미추홀시민아카이브가 대표적입니다. 기관이 놓치는 것을 주민이 메우고, 주민이 모은 것을 기관이 보존 기술로 받쳐주는 분업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기록관이 늘어나는 흐름도 이 두 축을 뒷받침합니다. 2022년 청주에 첫 기초자치단체 기록관이 문을 연 뒤 2025년 5월 이천이 두 번째로 설립됐습니다. 규모는 광역 기록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시군구 단위 기록관은 주민 생활권과 거리가 가까워 민간기록 수집과 시민 대상 교육을 함께 운영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천에서는 대학생을 마을기록 전문가로 길러내는 과정이 여러 기수째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두 축이 매끄럽게 맞물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시민이 모은 자료를 기관이 받아 보존하려면 수집 기준과 메타데이터 양식이 어느 정도 호환돼야 하는데,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사후에 문제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지역 기록관과 양식을 맞춰두면 나중에 자료를 옮길 때 훨씬 수월합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까요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왜 남기 어려운가
골목 간판과 상호의 변천교체 주기가 빠르고 아무도 촬영하지 않음
집 안의 물건 배치이사와 함께 흩어지고 사진에는 배경으로만 남음
동네 말투와 호칭음성으로 남기지 않으면 복원 불가
시장과 가게의 거래 방식문서가 남지 않는 구두 관행
명절과 제사의 실제 절차집집마다 달라 기록이 없으면 표준형만 남음

목록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당사자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기록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특별한 사건은 신문에 남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어디에도 남지 않습니다. 생활사 아카이브가 겨냥하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입니다.

디지털 기록이 늘었으니 자동으로 남을 것이라는 기대도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휴대폰 사진은 많지만 대부분 정리되지 않은 채 계정 안에 잠겨 있고, 계정이 정지되거나 서비스가 종료되면 통째로 사라집니다. 양이 늘어난 것과 남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관찰을 하다 보면 세대에 따라 남기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눈에 띕니다. 연세 있는 분들은 물건과 종이를 남기고, 젊은 층은 화면 속 이미지와 짧은 영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종이는 습기와 곰팡이에 약하고 디지털은 계정과 서비스에 묶여 있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취약한 셈입니다. 두 세대의 기록을 한 묶음으로 정리해 본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정작 부족한 게 자료가 아니라 그 자료를 설명해 줄 사람의 말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집에서 시작하는 생활사 기록 4단계

1단계 - 대상을 좁힙니다

집 전체나 동네 전체를 기록하려 하면 시작하지 못합니다. 부엌 한 곳, 혹은 어머니가 쓰는 물건 열 가지처럼 범위를 좁게 잡습니다. 완결된 작은 묶음이 흩어진 큰 묶음보다 쓸모가 큽니다.

2단계 - 사진에는 반드시 설명을 붙입니다

찍은 날짜, 장소, 찍은 이유를 한 줄씩 적습니다. 파일명에 날짜와 장소를 넣는 방식도 좋습니다. 이 한 줄이 없으면 십 년 뒤 그 사진은 쓸 수 없는 자료가 됩니다.

3단계 - 목소리를 남깁니다

물건을 찍을 때 그 물건에 대해 가족이 하는 설명을 휴대폰으로 녹음합니다. 정식 인터뷰가 아니어도 됩니다. "이거 언제 산 거예요"라고 묻고 답을 받는 5분이면 충분합니다. 구술은 나중에 다시 만들 수 없는 자료입니다.

4단계 - 두 곳 이상에 보관합니다

기기 한 대에만 두면 언젠가 잃어버립니다. 외장 저장장치와 클라우드처럼 성격이 다른 두 곳에 나눠 두고, 일 년에 한 번은 열어서 파일이 정상적으로 읽히는지 확인합니다.

남기는 이유를 스스로 정리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향수 때문인지, 가족에게 전하기 위해서인지, 동네의 변화를 증언하기 위해서인지에 따라 무엇을 얼마나 자세히 남길지가 달라집니다. 목적이 흐릿한 채로 모으기 시작하면 자료가 쌓일수록 정리가 어려워지고, 결국 열어보지 않는 폴더가 하나 더 늘어납니다.

기록이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들

현장에서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개인정보입니다. 골목을 찍으면 사람이 들어오고, 집 안을 찍으면 가족의 사적인 정보가 담깁니다. 그래서 기록단 활동에서는 촬영 동의와 공개 범위를 미리 정하는 절차가 반드시 들어갑니다. 수집은 폭넓게 하되 공개는 단계를 나누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두 번째는 지속성입니다. 사업 예산이 끊기면 활동이 멈추고, 모아둔 자료가 담당자 컴퓨터에 남은 채 잊히는 일이 생깁니다. 주민의 기록 활동을 아카이브의 좋은 사례로 평가한 논의에서도 수집 이후의 관리 주체를 정하는 문제가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모으는 것보다 이어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포맷입니다. 십여 년 전 유행하던 저장 방식과 파일 형식 중 상당수는 지금 열기 까다롭습니다. 기관이 표준 포맷으로 변환해 보존하는 이유가 이것인데, 개인이 모은 자료는 이 단계를 거치지 못한 채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능하면 널리 쓰이는 일반적인 형식으로 저장해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은 선별입니다. 모든 것을 남길 수는 없고,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순간 누군가의 판단이 개입합니다. 이 판단을 소수의 전문가에게만 맡기면 기록은 특정한 시선으로 기웁니다. 시민기록가 양성이 늘어나는 흐름은 이 선별의 주체를 넓히려는 시도로도 읽힙니다.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를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 정한다는것, 생활사 아카이브가 다른 기록 활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FAQ

평범한 물건도 기증이 되나요? 됩니다. 오히려 생활사 아카이브에서 귀한 것은 희귀품보다 당대에 흔했던 물건입니다. 흔했기 때문에 아무도 남기지 않아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기관마다 수집 방침과 보관 여건이 달라 사전에 문의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구술 기록은 전문가가 해야 하나요? 전문 채록에는 방법론이 있지만, 가족이 가족에게 묻는 기록은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날짜와 장소, 말한 사람을 함께 적어두는 것만 지키면 자료로서의 기본은 갖춰집니다.
시민기록가 활동은 어떻게 참여하나요? 지자체와 기록관, 지역 문화재단이 양성과정을 모집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마을 아카이브의 이해와 구술 채록 실습 같은 과정으로 구성되며, 수료 후 기록단 활동으로 이어지는 형태가 많습니다. 거주 지역 기록관이나 문화재단 공지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진이 이미 수천 장 있는데 이것도 아카이브인가요?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면 아직 자료라기보다 더미에 가깝습니다. 아카이브가 되려면 무엇을 찍은 것인지 설명이 붙고 찾을 수 있게 정리돼야 합니다. 전부를 정리하기 어렵다면 주제를 하나 정해 그 범위만 골라내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디지털로만 남겨도 괜찮을까요? 디지털은 복제와 공유에 강하지만 형식이 낡거나 저장 매체가 고장 나면 통째로 사라집니다. 중요한 자료는 성격이 다른 두 곳 이상에 나눠 보관하고, 핵심적인 것은 인쇄본을 함께 남겨두는 방식이 권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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